29. 스물아홉 번째 날 ; 2015. 11.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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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다.
◌ 오랜만에 집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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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알라모 지점까지는 약 30분 정도 소요되는데 아침이라 차가 정체되는 것을 고려하여 아침 8시 30분 경 숙소를 출발했다. 물론 GPS가 정확히 알라모 지점의 차량 반납하는 장소의 출입구까지 정확히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서둘렀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정도 목적지에 다 왔는가 싶더니 좌측 차선 유지라고 한다. 좌측으로 차선을 바꿔 조금 달리다 보니 도로 한가운데 주행 중에 목적지 도착이라고 알려준다. 순간 좌측으로 빠지는 출구가 나온다. 그 출구로 빠지니 바로 앞에 가던 차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런데 아내가 우측으로 무슨 안내판을 보고 그리로 가야하는데 우리가 잘못 차선을 들었다고 하며 도로 가운데서 불법 유턴을 하라고 한다. 좀 위험했지만 반대편에서 차가 오는지 확인하고 재빨리 유턴을 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오는데 한 차선은 우회전 한 차선은 좌회전 차선이다.
좌회전 차선을 들어서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면서 유턴을 해야 하는데 이곳은 유턴하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유턴을 해야 한다. 요령껏 유턴을 하고조금 전 아내가 본 그곳으로 우측으로 진입해 보니 우리가 잘못 들어왔다. 다시 나가 처음 우리가 좌측 출구로 빠진 곳을 계속가야 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알라모 지점을 찾아 차를 반납하고 그곳에서 무료 셔틀 열차를 타고 공항까지 가서 check in하고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우리말을 하는 한국 승무원들의 친절하고 상냥한 인사를 받으니 한 달 동안의 미국여행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나. 드디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다.
- 미국을 떠나면서 샌프란시스코 상공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
- 태평양 상공의 구름위를 날다 -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면서 우리의 역사와 관련된 아주 뜻깊은 자료를 소개한다. 우리 역사의 아픔이 어린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는 것이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1) 가수 백설희가 부른 샌프란시스코 노래의 배경
비너스동상을 얼싸안고 소근 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
네온의 불빛도 물결 따라 넘실대는 꽃 그림자
빌딩에 날아드는 비둘기를 부른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내일은 뉴욕으로 내일은 뉴욕으로
떠나가실 임이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꿈을 꾸는 님 그림자
달콤한 쿠키스에 쌍고동이 울린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이트 여객기가 나이트 여객기가
유성같이 나른다
2013. 7. 9(화)자 문화일보에 게재된 내용
황성규/논설위원
1978년 세샘 트리오가 부른 ‘나성에 가면’이란 노래 가사 속의 나성(羅城)이란 로스앤젤레스의 한자어 이름이다. 오늘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제1 항구도시. 하지만 처음부터 ‘항구의 1번지’는 아니었다. ‘골드러시’로 불리는 서부 대개척시대에 넘버 원 도시는 따로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북쪽 바닷가 마을 샌프란시스코! 1848년 기점으로 그곳에 엄청난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근 시에라네바다 산지에서 금광맥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800명 남짓이던 어촌 마을의 인구가 단숨에 2만5000명을 넘어섰다. 마을 이름도 예바브웨이나(Yerba Buena)에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바뀌었다. 1847년 13세기 이탈리아 아시스의 산프란치스코 수도회 창립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머리글 ‘샌(San)’ 대신 발음이 비슷한 한자 ‘뽕나무 상’자에 ‘항구 항’자를 덧붙여 ‘소코(桑港)’라 불렀다. 그냥 한글로 읽으면 ‘상항’이다.
동북아시아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황금의 도시 상항! 1951년, 그곳으로부터 6·25 전쟁 구호의 손길이 달려왔다. 미국이 2척의 병원선을 파견한 것. 인정 많은 한국인이 그냥 있을 리 없었다. 피란 시절임에도 이들 ‘평화의 사도들에게 보답’하는 노래가 만들어졌다. ‘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곤대는 별 그림자/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사시사철 검정 고무신에 검정 점퍼 차림이던 작사가 손로원의 가사에 박시춘이 곡을 붙이고 백설희가 노래한 이 ‘샌프란시스코’는 부산에서도 상항에서도 대히트였다.
1906·1989년의 두 차례 대지진도 거뜬히 극복한 샌프란시스코는 한·중·일의 역사가 서린 도시이기도 하다. 1900년대 초 도산 안창호 선생과 장인환·전명운 의사는 이곳에서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중국 교민들에게는 피와 땀에 젖은 도시다. 1933년 시작돼 4년 간 계속된 금문교(Golden Gate Bridge) 건설공사에 참여했던 수십 명의 중국인 이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에 비해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 일본은 1951년 9월 8일 연합국에 무릎 꿇는 강화(講和)조약을 맺었다, 그곳에서…. 결코 잊지 못할 ‘소코’ 아니, 샌프란시스코일 것이다.
(2) 샌프란시스코 조약(위키 백과사전에서 인용)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대일강화조약이라고도 한다)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공연예술 센터에서 맺어진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평화 조약이다.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48개국이 참가하여 서명하여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대부분의 나라는 전쟁피해에 대해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게 되었으나 국회에서 조약 비준이 부결된 인도네시아, 배상청구권을 포기하지 않은 필리핀과 남베트남, 그리고 조약에 초대조차 받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등과의 협상문제가 남게 되었다. 일본은 1955년부터 1959년에 걸쳐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베트남에 대해 보상을 하였다. 일본이 정식으로 침략 피해에 대해 배상한 것은 이 네 나라 뿐이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경제 원조를 하거나 무상 경제 협력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한국에 대해서는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배상청구권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하며 경제원조를 하는 것으로 하였다.
위와 같은 역사적인 의미를 알고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면 더 알찬 여행이 될 것이다.
다. 오랜만에 집에 도착하다
집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엉망이다. 가스레인지, 컴퓨터의 건전지가 다 나가고 자동차의 바테리도 모두 방전되었다. 늦게 도착했지만 집안 청소도 하고 저녁식사도 간단히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자는 잠이지만 편할 리 없다. 아내는 계속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하고 나도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는다. 지나간 한 달을 생각하니 꼭 꿈을 꾸고 온 것 같다.
인생 자체가 꿈이 아닌가?
모두 지나고 나면 일장춘몽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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