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대륙횡단 자동차 여행

21. 미국대륙횡단 여행기 2 ; 열세번째 날 4: 2016. 6. 6(월) - 헤밍웨이 기념관 ; 고양이 공동묘지

장호열 2017. 4. 21. 10:38

   헤밍웨이에 관심을 가지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의 서러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보듯이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공화국 측에는 비행기를 팔고 프랑코 측에는 가솔린을 파는 등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제관계에서의 신의는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 사이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우리 스스로 국력을 키우지 않으면 언제 또 국제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 모른다. 작금(昨今) 정치행태를 보면 조국의 앞날이 심히 우려되지만 대다수의 현명한 국민이 있기에 위대한 대한민국이 자손만대에 길이 이어질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또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중국을 방문하여 충칭에서 장제스를 만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이어진 파리해방전투에도 참여했다. 그는 평생 동안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여성편력은 물론 사냥, 복싱 등 위험하고 강렬한 스포츠를 즐기며 인생을 살다가 갔다.


   헤밍웨이 기념관은 쿠바의 아바나에도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노인과 바다’를 완성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3번째 아내인 마사 겔혼과 쿠바로 건너가 정착했는데 그녀 또한 기자 출신이라 가난한 사람을 취재하기 위해 외국으로 다녔기 때문에 안주인이 되어주길 바랬던 헤밍웨이와 부부생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있다. 헤밍웨이가 낚시하러 간 사이, 그가 기르던 수고양이들을 모두 거세해 버려 헤밍웨이의 화를 돋우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던 키 웨스트에 있는 기념관에 특이하게 눈에 들어오는 ‘Cat Cemetery’글자가 땅 바닥의 돌에 새겨져 있었는데 이 일화를 보니 헤밍웨이가 얼마나 고양이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겠다. 헤밍웨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키 웨스트의 기념관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것이 ‘고양이 후손’들이다.

                                                    - 헤밍웨이 기념관의 고양이 무덤 -

   헤밍웨이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크게 느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집은 1851년 해양 건축가이자 난파선 구조원인 에이사 티프트(Asa Tift)라는 사람에 의해 지어졌고 헤밍웨이 소유가 된 것은 1931년이라고 한다. 거실과 식당에 있는 가구들은 대부분 두 번째 부인 폴린이 파리에서 모아 왔다고 한다. 모두가 품격 있는 고가의 가구들이었다. 수영장은 키 웨스트에서는 처음으로 개인 주택 안에 지어진 것인데 길이는 약 20m로 현재까지 키 웨스트에서 가장 큰 개인 수영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화장실이나 식당 거실에 있는 가구며 침대 그리고 욕조 좌변기 등이 지금 필자가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비싼 고급스러운 것들이어서 필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와 같은 문화생활을 한 헤밍웨이가 부럽기도 하고 과연 미국이라는 나라의 문명의 실체는 어디까지 발전해 있을까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헤밍웨이 침실(베게 위의 검은 물체가 살아 있는 고양이)-
   헤밍웨이는 1899. 7. 21, 미국 일리노이 오크파크에서 태어나 1961. 7. 2, 61세의 나이로 아이다호 주 케첨의 자신의 집에서 엽총으로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61년간의 생애 동안 한마디로 원(願) 없는 인생을 살다 간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큰 짐승들을 사냥도 했고 멕시코 만에서 낚시를 즐겼으며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기도 하고 전쟁터에서 군인으로서 또는 종군기자로 눈부신 활약도 했다. 소설분야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문학부문에선 노벨상을 타기도 했다.


   집안에 걸려있는 사진에는 4명의 부인이 보이는데 첫 번째 부인 해들리(Hadley), 두번째 부인 폴린(Pauline), 세 번째 부인 마르사(Martha),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부인 메리(Mary), 처음 3명의 부인과는 이혼으로 끝났고 마지막 메리는 헤밍웨이가 죽을 때 같이 있었던 부인이다.
첫 번째 부인 해들리 사이에 난 아들 잭(Jack)은 여배우 ‘메리얼 헤밍웨이’와 ‘마르고 헤밍웨이’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두 번째 부인 폴린 사이에서 태어난 패트릭(Patrick)과 그레고리(Gregory)는 이곳 키 웨스트(Key West)에서 자랐다. 헤밍웨이는 폴린과 이혼 후 쿠바에서 정착해 살았고 1959년 쿠바혁명이 일어나기 전가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 방안에 걸려있는 헤밍웨이 사진 -

   헤밍웨이 기념관을 가이드 없이 대충 둘러보는데 만 한 두 시간은 걸린다. 물론 해설자를 따라 다니면서 구경하면 그 보다 더 시간이 걸리지만 우리는 돌아갈 시간을 생각하여 오후 4시 50분에 기념관을 나와 마이애미 숙소로 출발했다. 저녁 8시가 넘으니 어둑어둑 밤 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이국땅에서 되도록 야간 운전을 하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도 본의 아니게 야간 운전을 하게 되었다.


                                                         - 호텔로 돌아오는 길 -


왕복 550km, 호텔에 도착하니 저녁 8시 50분이 되었다. 꼭 4시간을 운전했다. 돌아오는 길이 멀고 빨리 오려는 욕심에 혼자서 운전대를 잡고 과속에 차선변경을 자주하며 추월한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피로가 한숨에 달려온다. 밤 9시가 다 되어 아내가 번개같이 준비한 저녁을 먹었다.


문 밖에선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친다. 조금만 늦었어도 폭풍우까지 만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