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남자 친구 - 1 : 엄마와 딸 '무도장'에 가다.
엄마의 남자 친구 - 1 : 엄마와 딸 '무도장'에 가다.
- 음악에 맞추어 지르박을 추는 엄마의 발걸음 사뿐하고 -
베란다에 꽃을 걸어 놓고 싶어 퇴근길에 화원으로 갔다. 꽃구경도 하고 베란다에 걸어놓을 꽃과, 엄마가 좋아할 만한 작은 선인장 화분을 사서 차에 싣는데 운전석 창문에 명함이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조명아래 여자와 남자가 무도복을 입고 왈츠인지 탱고인지를 추는 작은 그림이 있고 그 옆에 큰 글씨로 '**무도장'이라는 상호와, 수원의 최고시설, 200평 규모의 대형규모, 정통카바레 음악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주차하여 놓은 차에 무작정 홍보용 명함을 돌린 것이겠지만 난 '내가 이런게 갈 사람으로 보였나?'하는 괜한 트집이 생겨 명함을 던져버렸다.
집을 향해 운전을 하다가 가만 생각하니 엄마를 한번 모시고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명함을 다시 집어 핸드백 안에 집어넣었다.
엄마는 치매에 걸리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소위 '무도장'이라는 곳엘 갔다. 엄마의 남자친구인 아저씨를 그곳에서 만났고 아저씨에게 춤 교습을 받았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그러니까 엄마가 68세인가부터 그 이후 쓰러지시기 전인 2003년 3월까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도 빠짐없이 무도장을 다녔었던 것이다.
처음엔 엄마가 춤을 추러 다닌다는 것이 건전하지 못한 일인 듯싶어 께름칙하게 느껴졌으나 춤을 추러 다니면서 엄마가 삶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이고 규칙적이 되었을 뿐 아니라 건강에도 매우 좋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터는 나의 생각은 매우 긍정적이 되었었다.
평생 얼굴에 화장 한번 하지 않던 엄마가 화장도 하고 빨간색 블라우스에 검정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는 등 옷의 화려함도 더해갔다. 자그마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나이보다 한참이나 젊어 보이는 엄마가 옷도 세련되게 잘 입어 할아버지들에게 인기도 꽤 있었던 것 같았다.
치매에 걸린 이후 그렇게 좋아하던 무도장을 엄마는 한 번도 갈 수가 없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처지에 춤을 출 수는 더욱이 없었기에 아저씨가 놀러 오실 때 가끔 음악을 틀어드리면 몇 발자국 춤을 추다가는 숨이 차서 이내 멈추고는 하였다.
엄마가 훨훨 춤을 추며 그렇게 좋아하고 행복해 하였던 그 시절로 잠시라도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난 아저씨가 오시는 날 엄마와 아저씨를 모시고 무도장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무도장도 소위 '물'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오십대들이 가는 곳이 있고 노인들이 가는 무도장이 있다는 아저씨의 말에 난 먼저 잘 간직했던 무도장의 명함을 찾아 "노인 두 분을 모시고 가려하는데 그 곳에 오는 분들의 연령대가 어찌되느냐"고 물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노인'이라는 말에 난색을 표했다. 자기네 집은 4~50대가 오는 곳이라며 노인 분들은 조금 곤란하다는 말에 난 보호자가 함께 간다고 우기며 위치를 물었다.
엄마에게 무도장에서 화려하게 보일 옷으로 갈아입힌 후 용인에서 출발하여 수원에 있는 무도장까지 30분만에 도착하였다.
카바레도 가본적도 없는 내가 무도장을 가자니 "남자들이 춤이라도 추자고 달라붙으면 어쩌지?"하는 걱정과 함께 겁이 나기도 하였다. 수원 최고의 시설이라는 문구와는 달리 허름한 건물의 6층에 무도장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벌써 쿵짝거리는 음악의 진동이 울려왔다.
목욕탕의 매표구 같은 입구에서 인당 2000원씩 6000원을 내고는 입장을 했다. 보통 나이트클럽에 무대가 있고 그 주변에 테이블이 있고 온갖 화려한 조명과 장식이 되어 있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무도회장 안은 의외로 단순했다.
홍보 명함에 쓰여 진 것처럼 최고의 시설도 200평 규모도 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쿵짝거리는 것이 정통 카바레 음악 같기는 하였다.
문화센터의 다목적 홀 같이 한쪽 벽면은 전면 거울이었고 바닥은 나무로 깔려 있었다. 홀의 벽을 따라 30cm폭의 나무 의자가 쭉 둘러쳐져 있어 춤을 추다가 언제라도 잠시 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어두운 실내에는 빙글빙글 돌아가며 빛을 팍팍 쏘아주는 사이키 조명이 세 개쯤 설치되어 있었고 천장라인을 따라 작은 색전구를 달아 번쩍임을 강조했을 뿐 공간에서 주는 화려함이나 무도장이라는 선입견이 갖는 은밀한 폐쇄감은 없었다.
엄마와 아저씨 그리고 나는 입구에 앉아 있었다. 전화 받던 사람의 말대로 30대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곳 무도장은 정말 사오십대가 주로 오는 곳 같았다. 월요일 오후시간대였는데 입구 쪽에는 5~6쌍이 있었고 약간 안쪽에는 위아래로 검정색 옷을 입고 스포츠를 하듯 춤을 추는 프로급 몇 쌍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가벼운 캐주얼 차림의 혹은 정장 차림의 남녀들이 무대를 종횡무진으로 춤을 추는데 그들에게 어떠한 퇴폐성도 느낄 수가 없었다. 무대 매너를 갖춘 채 춤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백한송이 장미'란 외국곡을 심수봉씨가 불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곳 무도장에서는 뽕짝 버전으로 불려져 지르박을 추는 음악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얼마간 무대를 보며 춤을 감상(?)하고 있는데 그곳 사장으로 보이는 40대의 여성이 왔다. 젊은 사람들이 오는 곳에 백발의 노인들이 와서 물 흐려 놓았다고 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두 노인을 모시고 오게 된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였더니 사장은 고맙게도 '너무 너무 잘 오셨다'며 엄마와 아저씨를 무대로 잡아끌어 춤을 추도록 머쓱함을 없애 주었다.
엄마와 아저씨는 무대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엄마도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스텝을 열심히 밟고 아저씨는 엄마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리드하느라 열심이었다.
나와 무도장 사장은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엄마와 아저씨에게 박수를 치고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언젠가 친구가 자신의 장인어른이 무도장을 가는 바람에 처갓집이 발칵 뒤집혔다는 얘기를 하였다. 학교 교장까지 지내신 장인어른은 딸만 셋이었는데 은퇴를 하고 난 한참 후 무도장을 나갔는데 이를 장모보다 세 딸들이 더욱 극렬한 반대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사위인 자신이 '운동도 되고 시간도 때우고 뭐가 문제냐'며 대신 항변을 해 주었다는 말을 들어 맞장구를 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많아지는 것은 시간뿐이고 없어지는 것은 돈과 건강 그리고 친구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인들에게 무도장은 꽤나 유익한 공간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노인들이 다니는 무도장은 그동안 입장료 1000원에 국수까지 말아 주었다는데 지금은 이마저 경쟁이 치열해져 입장료가 500원으로 내리면서 국수는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름엔 에어컨이 쉼 없이 시원하게 나오고 겨울엔 따뜻하여 노인들의 지루한 시간도 달래주며 잃어가는 건강과 활기도 살려주는 매우 유익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친구까지 만들어 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엄마와 아저씨가 춤을 추는 것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차에 중년의 남성이 내게 와서 묻는다.
"한번 추실까요?"
순간 움찔하여 어머님을 모시고 왔노라며 거절하자 그 남성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무대 위에서 춤추기에 신이 난 엄마는 쉬엄쉬엄하기는 하였지만 아저씨와 5곡이나 춤을 추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엄마가 춤을 몇 곡씩이나 추는 걸 보니 너무나 기뻤다.
나는 가지고 간 카메라로 엄마와 아저씨가 춤추는 모습을 찍어드렸다. 비록 어눌한 몸놀림으로 춤을 추고 있지만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그 어느 누구보다 멋진 모습이었다.
다음번에는 엄마가 그 화려했던 날들의 기억을 다시 되새길 수 있도록 엄마와 아저씨가 과거 다니시던, 노인들이 '주류'인 그 무도장으로 모시고 가야겠다.
그런데 난 조금 걱정이다.
이번엔 할아버지들이 Shall we dance? 하면 어쩌지?
2003/06/27 오전 12:15 ⓒ 2003 OhmyNews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신희철(s1960) 기자)